어느 날 어느 날 소순희 그땐 그랬다 지하철 1호선 후텁지근한 여름날 흔들리며 가는 땅 속, 비좁은 공간에서 늙수그레한 아주머니 발이 밟힌 모양이다. "왜 발을 밟고 그랴!" 그 옆 여학생 "안 밟았는데요" 둘이 실랑이가 오가다 "이게, 어디서 눈을 똥그랗게 뜨고 대들어" "그러면 눈을 네모로 뜨나요?" 헐~ 갑자기 짜증이 확 풀린 지하철 1호선 여름날 이었다 시와 사랑 2021.06.10
동강에서 동강에서 소순희 봄 산자락만 보다가 봄이 다 가고 깊어지는 물소리 듣다가 또 봄이 다 가고 백운산 벼랑에 홀로 피었다지는 동강 할미꽃 흰머리 날리는 봄이 다 가고 나, 언제나 저 산, 저 물처럼 시름없이 봄을 보낼까 2021 시와 사랑 2021.05.27
정선에 와서 정선에 와서 소순희 아침보다 먼저 물소리가 찾아드는 정선에 와서 한 사나흘 신문도 읽지 않고 라디오도 듣지 않고 TV도 시청하지 않으매 맑아지는 머릿 속으로 산뽕나무에 감기던 바람이 찾아 오고 산새 소리가 귀를 열었다 눈 감고 귀 막고 입 다문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만 저리도 높으신 양반들 목소리 듣지 않노니 세상에 이렇게도 맑아지는 이치 있거늘 무슨 연유로 거기 탁류에 휩쓸려 가야 하는가 간혹, 지친 육신의 허물을 청류에 휘적휘적 빨아 널고 물처럼 유유히 바람처럼 훠이훠이 살아 볼 일이다 2004 시와 사랑 2021.05.16
어느 봄날 십 오륙 년 전 제자의 집에서 포기나누기로 얻어 온 공작선인장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꽃을 피웠다. 몇 해가 지나도록 꽃 피울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저 무관심으로 죽지 않을 만큼 물 주고 겨울 추위에도 베란다에 방치하다시피 두었는데 지난해 봄부터 꽃자리를 잡더니 맑고 진한 붉은빛 꽃을 달아 주었다. 기특한 것 ! 내가 간섭하지 않아도 때 되면 할 일 다 하는 자연률의 일부를 대하니 이 오묘한 섭리 앞에 내 존재는 작아지고 마음은 넓어지는 기분이다. 이러함이 어찌 인간의 힘으로 된다는 말인가? 2021.4.29. 소순희 그림이야기(캔바스 위의 날들) 2021.04.29
구로다 세이키 기념관에서 구로다 세이키 기념관에서 소순희 일본 근대 서양미술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구로다 세이키(1866~1924) 기념관은 1928년에 지어졌다. 그 기념관을 찾을 때는 겨울 저녁 무렵으로 석양이 건물 외벽에 포근한 색채를 내리고 키 큰 나무들의 끝머리에 하루의 빛이 내려앉을 즈음이다. 개관 특별 전시 기간은 2017.1.2.~15 / 2017.3.27~4.9 이고 보니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100여 년이 넘은 작품들을 대하며 그 시대에 서양 미술의 흐름에 합류한 동양의 한 화가로 성장한 그분의 삶을 조금이나마 엿 보며 그림에 대한 필연적 각오를 새긴다. 수용 보다는 배척의 시선이 강했을 시대이고 보면 예술이 갖는 힘은 정신 세계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영혼의 맑음으로 직격탄 처럼 마음에 꽂힌다. 일본인 이라면.. 그림이야기(캔바스 위의 날들) 2021.04.22
봄볕 봄볕/소순희작/Oil on Canvas 봄볕 소순희 어렵사리 비집고 든 봄볕 몇 점을 저울에 달아 보았다 낡은 촉수의 바늘은 한 바퀴 돌아 원점에 와 있고 작은 개미 한 마리 체중을 재는 봄날 뜬금없이, 허깨비 같은 어머니 몸무게가 떠오른 것일까 나긋나긋 파고드는 봄볕이 어깨에 얹힐 때 그분의 따순 손길 봄날에 우련하다 2011 시와 사랑 2021.04.14
복사꽃 편지 소순희작/도원/Oil Painting 복사꽃 편지 소순희 저기 저 복사꽃 분분한 풍경 차곡차곡 접어 당신께 보냅니다 화첩 묶은 편지 펼치시면 그때 눈부시던 날이 오래도록 머물러 마음에 편집된 수상한 세월도 오솔길로 굽어드는 강변 어디쯤 꽃으로 피어납니다 작은 새가 된 글씨는 포롱포롱 날아올라 당신 꿈자리까지 수줍게 분홍의 꽃잎을 물어 나르겠지요 보고픈 당신 이 봄도 안녕! 카테고리 없음 2021.04.08
탱자꽃 탱자꽃 소순희 탱자나무 산울에 꽃이 피었다 설희의 하얀 이마에 꽂히던 봄볕도 흙 마당에 기울던 탱자 울 그림자도 나른하게 사라진 오십 년도 더 된 흰빛 아득한 추억 속 일말의 꿈조차 생소한 유년의 봄날이 지금에 와 생각하면 탱자꽃 같았다 더러는 세상에서 소멸한 청빈한 일들이 탱자꽃 향기로 은은히 전해오는 생의 서쪽에서 뒤돌아보면 그리운 순간들은 노을 속에 편집된다 별것 아닌 것에 애태우며 떠밀려온 이 나이를 탓해서 무엇하랴 피고 지는 꽃 보며 또 한 해 헤쳐가라고 느슨해진 봄날 탱자나무 가시가 내 심중을 찌른다 2021 시와 사랑 2021.04.04
마지막 밥 일기/소순희작/Oil on Canvas/2020 마지막 밥 소순희 아부지와 밥 먹는데 파리가 날아와 같이 먹는다 겁도 없이 딴은 미안한지 손도 비비며 날개도 닦는다 딱, 그때 일순의 손짓 나자빠진 파리 죽어가며 하는 말 내가 먹으면 얼마나 먹겠다고.... 카테고리 없음 2021.03.21
오늘 오늘 소순희 우수, 경칩 지난 나뭇가지 물오른 끝마다 올려다본 눈길 얼마나 아름다웠는가 얼음이 풀리는 모래톱에 둥글게 남은 작은 물새 발자국처럼 내가 뿌린 언어들 얼마나 진실했는가 오늘 하루 돌아볼 일이다 먼 데서 혹은 가까이서 기별 없이 봄은 오는데 천지 사방에서 쏟아지는 뉴스 듣지 않음만 못한 죽은 언어들로 채워진 더러운 두 귀를 오늘 잠들기 전 씻고 씻을 일이다 2005 시와 사랑 2021.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