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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물장수 할아버지

방물장수 할아버지 소순희 그 방물장수 할아버지가 가위를 짤그랑대며 마을 길을 들어설 때는 겨울 오전쯤이었다. 누나들은 머리핀이나 옷핀을 사기 위해 하나둘 모여들었다. 정사각형 빳빳한 종이 위에 원을 그리며 검게 꽂혀있던 머리핀을 사고 가끔은 실타래나 바늘을 사기도 했다. 키가 작은 할아버지가 등에 지고 온 사과 궤짝만 한 곳엔 생필품이며 가락엿이 고작 몇 줄 밀가루 판에 묻혀 있었다. 비싼 거라곤 전혀 찾아보기 어려운 참 소박한 등짐이 그 할아버지의 전 재산 같았다. 그 겨우내 시베리아의 붉은 융단 같은 모자는 손 집는 부분이 낡아 흰 천이 드러났다. 그 밑으로 늘 엉성한 흰 귀밑머리가 보였고 가끔은 모자를 벗어 땀을 닦곤 했다. 그때마다 달라붙은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깡마른 얼굴에 광대뼈가 유..

19번 국도

19번 국도 소순희 그날을 떠나오며 등 뒤로 멀어지는 너에게 푸른 산굽이로 숨어든 하늘 한 조각이 거울처럼 선연하다 모든 것으로부터 무죄인듯 내 생의 일단락이 못 박힌 흔적처럼 녹물 고인 계절을 끌어가는 생의 5부 능선을 넘어간다 석 달 열흘을 앓고 난 다음 날 눈에 든 과수원 배꽃이 처음으로 이마 위에 각인되던 허기진 봄날 너와의 결별을 예고라도 했을까 낮 뻐꾸기 울음 산길을 가웃 짚어 가는데 길은 또 길 속으로 사라지는 나의 19번 국도 2016

시와 사랑 2021.11.23

칠족령에서

칠족령(漆足嶺)에서 소순희 칠족령 벼랑에서 한 마디 묻노니 절세에 미친 바람을 보았느냐고 말없이 고개 떨군 산줄기마다 그 바람을 쓸어 올려 부유하는 곡선의 허리로 감아 내리네 중생대 쥐라기에 사람 없을 때 지각은 꿈틀거려 변동되고 땅은 파죽지세로 흘러내려 산을 이루었다지 그 낮음에 유장한 물흐름을 백운산 마루에서 바라보면 산 뿌리 겹겹을 돌아가는 물줄기 동강이라 하니 뱀처럼 숨어 어디로 가는가 나는 또 미친 바람처럼 어디로 흐를 것인가 칠족령 벼랑에 서서 내게 묻노니 2021

시와 사랑 2021.11.14

우리 아짐

우리 아짐 소순희 아이들의 함성이 도시의 가을 하늘로 풍선처럼 떠 오르고 있었다. 넓은 잎 플라타너스 나무가 투명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운동장 가에는 흰 운동복을 입은 어린아이들이 꼬물꼬물 모여 응원을 하고 한 무리의 아이들이 운동장을 달리고 있었다. 따스한 가을 햇살 아래 나는 키 발을 딛고 벽돌 담장 너머로 아이들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이들의 함성 속에 함께 묻혀 있자니 불현듯 코끝이 찡해오며 눈물이 핑 돌았다. 그건 내 유년의 소상한 기억 저편으로 폴짝 뛰어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 가을 오후는 늘 서늘했다. 운동회 연습을 마치고 돌아가는 텅 빈 운동장엔 미루나무 긴 그림자가 줄지어 뻗어 있곤 했다. 이 때 쯤이면 출출해졌다. 빨리 집에 가서 삶아놓은 고구마나, 감나무에 달..

씨앗

씨앗 소순희 쌓인 눈이 녹고 찬 바람이 불고 지나간 버스 정류장 철제 울타리를 타고 오른 마르고 비틀린 나팔꽃 덩굴에 동그랗게 달린 통을 만져보니 까만 씨앗이 툭 튀어나온다. 겨울 견디는 씨앗의 눈이 귀여워 여나므개 통을 터뜨려 꽃씨를 받아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우연히 만져지는 우둘투둘 단단한 것이 마음 쓰여 꺼내 보니 나팔꽃 씨였다. 봄이 오면 심으려고 종이봉투에 넣어 나팔꽃 씨라고 써 놓았다. 그 작은 것이 잠에서 깨어나는 적합한 필요조건인 햇볕, 온도, 수분을 주면 휴면 상태에서 생장 활동으로 변이가 시작되면서 종피를 뚫고 밖으로 나오는데 이것을 발아라고 한다.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에서 나온 2천 년 전 볍씨에서 싹이 돋았다는 이야기가 보도된 바 있다. 또한 중국 동한 시대 2천 년 전 고묘 에서 ..

정동진에서

정동진에서 소순희 죽어 별이 되고 싶다던 남자가 있었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 가을 끝이 부서지고 상강이 지난 다음 날 북두 천공을 횡단한 동해의 수평선이 그어지고 있었다 정 동쪽의 심장을 중심으로 가을별은 왜 이다지도 또렷이 피어나서 위태로운 한 남자의 애를 태우느냐 죽어 별이 되고 싶다던 그 남자 가을 끝에 홀로 서 있었다 2017

카테고리 없음 2021.10.23

알밤

알밤 소순희 휴억이 보내온 빛고운 알밤에 고향의 산바람과 햇볕이 가득 배어 있다 어쩌다 알밤 속 길 내며 파고든 통통한 애벌레도 땅심 깊은 고향의 생명이어서 반가워라 아직은 거둬들일 풍경이 아닌지라 한 올도 지워지지 않는 산천의 남녘 하늘은 멀어 그러나 마음은 거기 오십여 년 전 고향 유월의 밤꽃 숲을 지나온 한 때의 시절은 아름다웠다 오랫동안 길을 잃은 것도 아닌 가을은 제자리로 돌아와 홀연히 몸 낮추는 이 가을 녘, 흐름도 느리게 다가서는데 알밤 줍는 소년이 된 나는 어디에 발 내리고 쉬어야 하나 2021

시와 사랑 2021.10.19

곰배령에서

곰배령에서 소순희 곰배령 오르는 징검다리 건너다 부르던 노래를 멈추고 말았다 개울가 그늘에 숨어 내 노래 듣다 그만, 눈 맞춤한 물봉선 그 선홍의 빛깔에 왜 그녀가 생각났을까 여기 와선 별일 없이 넘어서는 *산경표에 이름 석 자 그립게 새겨 넣어도 될 계절의 푸른 등어리마다 꽃을 피운다 움켜쥔 하늘 한쪽으로 두고 온 도회의 숙성된 고집이 절명하는 비린 야생에서 내 생에 한 번만이라도 처절한 은둔자로 시린 마음 하나 꽃 피운다면 아아 굴종도 배고픔도 한갓 지나는 바람일 뿐이리 2013 *산경표-조선후기 문신·학자 신경준이 조선의 산맥[山經]체계를 도표로 정리하여 영조 연간에 편찬한 지리서. 역사지리지

시와 사랑 2021.10.08

삼척 덕풍계곡 용소골에서

큰 바위 얼굴 (위) 덕풍계곡 용소골 소순희 청량한 물소리 듣고 싶거든 오지 중에 오지 용소골에 가라 골골의 물줄기 한곳에 모여 오장육부를 옹골지게 훑어 내는 신선계의 물소리와 산바람에 마음 누이면 먼 태곳적 전설도 풀꽃 한 송이로 피어난다 바위틈 쑥부쟁이 피어 하늘로 오르는 초가을이면 내게 길 묻는 그대여 물소리도 알차게 영그는 덕풍 계류 용소골에 가서 지난여름 더위에 지친 마음의 귀를 말갛게 씻을 일이다 2021

시와 사랑 2021.09.30

동해 두타산 베틀 바위

(오른쪽 아래를 보면 사람의 옆 얼굴이 보인다.) 동해 두타산 베틀 바위에 가서 한반도의 등뼈를 이루는 백두대간의 중심부에 솟은 두타산([頭陀山] 1,353m) 그곳 산중에 은거하는 천혜의 비경이 베틀 바위(550m)이다. 전설을 듣자면 그럴싸하게 포장된 허구인데도 마음은 늘 그렇거니 하면서도 숙연해진다. 두타의 품에 숨겨둔 기암괴석을 어떤 예술가의 작품에 비교할까! 무릉계곡 초입에서 1.5Km의 가파른 산길을 한 시간여의 발품을 파는 사람에게만 허락한 비경임을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확인할 수 있다. 2억5천 만년 전 중생대에 지각변동으로 형성된 지형이지만 신은 인간에게 욕심을 내려놓으라는 의미로 저 웅장한 별천지를 하사하신 모양이다. 두타에서 바라본 청옥산은 그대로 푸르게 능선을 이뤄 흐르고 바위 절벽..

카테고리 없음 2021.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