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해바라기 가을 해바라기 소순희 가을녘에는 조부의 정강이뼈 같은 해바라기 마른 대궁이 자꾸만 눈에 든다 첫 잎은 이미 바람에 삭은 삭신 같거니 저 서늘한 바람에 몸 기대어 물관부 위로 오르는 끈질긴 생의 적막함 상강 지난 햇살 아래 이제야 꽃 피우는 걸 세상에나 자기 몸 말리며 위로는 검은 눈을 뜨네 2020 시와 사랑 2020.10.29
천불동 계곡에서 천불동 계곡에서 소순희 나, 여기오면 가슴에 천불이 난다 꼭 한 번은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저 맑은 저 붉은 단풍 아래 묻혀있는 千佛洞 계곡 당신은 끝내 올 수도 없는 내가 무작정 갈 수도 없는 끊긴 길이라 나 여기 죽어도 서럽지 않을 가을 천불동에 들면 곰삭은 색깔마다 당신 웃음소리 저렇게 피는데 사랑했노라고 사랑한다고 짧은 수화로 보내는 기막힌 연서를 아직도 기별 없는 천불동에서 한동안 물소리로 달래며 이 예쁜 곳 안기지 못한 나는 이적지 미치도록 가슴에 천불이 난다. 2017 시와 사랑 2020.10.20
달개비,누님 달개비, 누님 소순희 살고 싶은 그 하루 그 슬픈 청보라 빛깔을 사랑했네 뽕나무 그루터기에 뿌리 뽑혀 던져진 달개비 살아보자고 안간힘 쓰는 늦여름의 목마름을 내 안의 외길에서 보았네 끝내 정신 줄 놓지 않고 푸르름 움켜쥐고 살아낸 구로공단 그 어린 내 누님 청보라 푸른 꽃잎 눈 떠도 눈 감아도 시와 사랑 2020.10.12
가을 농부 가을 농부 소순희 저 가을 길 걷는 농부여 한 발자국도 허투루 걷지 않는구나 남몰래 애 터지게 지나온 계절도 가을 발아래 두어 수월하게 넘나니 웃자랄 것 아무것도 없는 지금은 가만히 속으로만 익는 지상의 숨결 지나가는 가을 하늘 까막까치도 고마울 일이네 시와 사랑 2020.10.06
환청 환청 소순희 봄밤에 듣던 소쩍새 소리가 여름밤에 듣던 무논의 개구리 소리가 가을밤 툇마루에서 듣던 귀뚜리 소리가 겨울밤에 듣던 개 짖는 소리가 고향 떠나온 사십여 년 계절마다 귀에 들리니 나, 또 한 해 끄떡없이 살고지고 시와 사랑 2020.09.19
여름비라서 여름비라서 소순희 양철지붕 두드리는 빗소리가 조모의 옛이야기 같아서 가만히 내 잠을 파고드는 여름비라서 문밖에 곧게 내리는 비라서 옥수수 잎사귀를 톡톡 건드리는 산촌의 한나절을 무심히 잠속으로 끌어들이는 조모의 옛이야기 같은 여름 비라서 시와 사랑 2020.09.08
다시,그 길 다시, 그 길 소순희 무심코 버린 길 하나 오늘 찾았습니다 마음에서 지워진 길이라 발자국마저 묻혀버린 몇 해의 길 위로 당신이 걷는다는 바람의 소식에 나는 잊힌 시간의 회로를 되짚어갑니다 다시, 그 길을 걸어야 할 이유를 당신이 오가는 길이기에 라고 적습니다 길은 언제나 거기 있었습니다 내가 지운 길옆 외로웠던 날을 계수하는 플라타너스의 흰 몸에 새겨진 흔적도 그대로 아물고 있었습니다 시와 사랑 2020.09.04
배롱나무 배롱나무 소순희 간지럼 잘 탄다는 배롱나무 겨드랑이 간질이다 나는 그만 내 몸이 간지러워 손 놓고 히죽이 웃고 말았습니다 배롱나무도 그런 내가 우스운지 속살 같은 목질부를 뒤채며 웃고 있었습니다 2020 시와 사랑 2020.09.01
온수리 그녀 온수리 그녀 소순희 온수리의 아침을 닮은 그녀가 첫차에 아침을 싣고 왔지요 언뜻, 등 뒤에서 산나리꽃이 하늘거리다 사라진 꽃무늬 원피스 결에서 맑은 웃음소리가 톡톡 튀어나왔어요 온수리의 아침은 큰산 기침 소리로 깨어나고 눈고운 새들이 딛고 다닌 나뭇가지마다 꽃망울이 터지고 있었지요 소읍의 어린이 집으로 날마다 아침을 싣고 온 그녀는 아침 닮은 예쁜 배달부 시와 사랑 2020.08.24
비 갠 뒤 비 갠 뒤 소순희 비 개고 큰물 나간 뒤 천변에 나가 보았다 말라가는 웅덩이마다 갇힌 어린 물고기들이 헐떡이고 있었다 몇 시간 후면 눈부신 흰 배 드러내며 죽음을 맞이할 동그란 눈이 불쌍해 나는 두 손으로 움켜 냇물에 놓아 주었다 작은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사라지는 생명을 보며 내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주님을 생각했다 시와 사랑 2020.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