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사랑 434

봉숭아

봉숭아 소순희 장독대 곁에 다물다물 매달려 꽃 핀 봉숭아 따 팔순 지난 할머니 감나무 그늘에 앉아 손톱에 봉숭아 꽃물 들인다 동여 맨 열 손가락 수줍게 내밀며 "봉숭아 꽃물디리면 저승길이 밝다요." 눈 감으면 어두워 이승의 숨 놓으면 그 가는 저승길 어두워 훤히 밝히고픈 염원으로 꽃물 드리는 예쁜 손톱 아아 살아가는 동안 몇 해의 여름이 더 다소곳이 지워졌으면

시와 사랑 2020.07.20

시든 꽃 보며

시든 꽃 보며 소순희 꽃이 시들고도 꽃진 자리에 밴 향기는 오래도록 머물러 주었다 사람들 눈길 거둔 꽃자리에 곱게 싸 안은 꽃의 자궁 속 검은 눈빛 씨앗들 꽃이 지지 않고 어찌 열매 맺히랴 어머니, 늙고 초라해질 때 자식들 뼈 굵어지고 머리 커지니 내리사랑이라고 쉬이 말하지 마라 지켜낸 한 세상 이제야 저물어 늦가을 빈들에 사위는 하룻빛 어스름처럼 약해진 어머니 육신 어느 누가 세상의 꽃이라 말하지 못하랴 계절의 꽃 진 다음에 채워지는 찬란한 아픔이여! 2014

시와 사랑 2020.06.30

사랑도 하루 일 같아

사랑도 하루 일 같아 소순희 돌아서는 등 뒤로 한 번도 내어주지 않던 노을이 피었습니다 밤꽃 환한 유월 저녁도 서둘러 그림자를 지우고 산은 더 검푸르게 제자리로 돌아가 웅크립니다 그대 사랑한 만큼 하루해도 짧아 저녁 새 몇 마리 어스름 가르며 대숲으로 숨어들 듯 사랑도 한갓 하루 일 같아 기막힌 저녁놀 빛 속으로 숨어듭니다 본디 사랑함에 있어 숙맥인지라 애써 태연한 척 어두워져 가는 밤꽃 숲을 바라보았습니다 쉬이 눈을 거둘 일 아닌 풍경 속에서 자꾸만 주먹으로 닦는 눈물이 막차의 불빛에 빨려들고 있었습니다

시와 사랑 2020.06.20

눈과 마음으로 볼 때

눈과 마음으로 볼 때 소순희 눈을 뜨고 다녀도 보지 못하는 것들이 있고 마음을 열고 다녀도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눈과 마음의 분리로 따로, 또 같이 가지만 바라보아야 할 거리를 가늠하며 평행선 같은 행로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아무것도 아니듯 스치는 것들에 마음 줄 때 모든 생명 가진 것이 곱고 부지중, 마주치는 것이 새삼 고맙다 마음과 눈이 하나 되어야 비로소 보이지 않던 것도 보이고 마음 밖에 있던 것들 드러나 살아있는 모든 것에 기쁨이 된다.

시와 사랑 2020.06.04

순례자

순례자 소순희 여우비 지나간 뒤 두릅나무 새순이 돋았다 어쩌면 저렇게 돋음이 예쁠까 가시를 지닌 나무 신께서 말씀으로 지으신 뜻 알 것 같다 봉인된 봄을 가져온 나의 순례자여! 이 땅에 나그네로 살아가는 동안 기쁨 누리라고 신께서 개봉하신 이 봄 육십 평생이 이렇게 환한 줄 몰랐다 새순을 보고 설렘이 있다는 건 천만다행이다 이제 가는 길 모두 순례길이니 오오! 막막함도 쓸쓸함도 이리 아름다운 것을

시와 사랑 2020.05.29

개발 구역 오동나무

개발 구역 오동나무 소순희 양평동 고물상 터 개발 구역으로 지정된 다음 고물들은 다시 어딘가로 팔려 가고 빈터에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선 오동나무가 꽃을 피웠다 올봄에 피워낸 꽃이 마지막 꽃임을 알까 저 나무가 자라던 땅에 시멘트 기둥이 심어지고 십수 년이 지나도 꽃은 피지 않으리라 도회지 빈터 같은 내 마음에 이 봄날 오동나무가 꺽꺽 울고 있다

시와 사랑 2020.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