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사랑 434

한순간 꿈처럼

한순간 꿈처럼 소순희 저 색깔 고운 가을녘이면 님아 죽음보다 깊은 잠도 헛되지 않으리 결국은 너와 나 황혼의 가을 속에 눕는 일이 그다지 부끄럽지 않거니와 목멘 기다림도 구석기 유물처럼 무딘 족쇄의 구속인 걸 지상의 살아 있는 것이 숨죽여 침묵할 때 가만히 침잠하는 몹쓸 놈의 잠도 귓바퀴를 돌다 쉬이 거두어들이는 그늘 속에 다시 빈손으로 접는 긴 산 그림자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시점에서 서로 다른 뜻도 기어이 소실점으로 사라지는 허망한 바람 같은 것 아니더냐 사랑도 한갓 생의 추임새로 신명 나더니 한순간 꿈처럼 지나온 세월 앞에 온순해지네 아, 아 몰락함도 어차피 시린 너와 나의 황혼 2019

시와 사랑 2019.11.18

가을 안부

가을 안부 소순희 사랑하는 이여! 가을볕 찬란히 눈부시다 잘 있느냐고 안부를 묻지만 꿈결 같은 날은 또 저렇게 속절없이 지고 우리는 이 가을 어디서 만날 것인가 붉은 색깔로 타오르는 맨드라미처럼 정녕 이 가을 속 알 수 없구나 내 삶이 느슨해질 때 곰삭은 가을 한쪽으로 다시 팽팽해지는 필연의 계절 나, 너로 인해 붉게 피가 잘 돌아 정신 맑은 가을이다 사랑하는 이여! 이 가을 잘 있느냐고

시와 사랑 2019.10.28

정선에서

정선에서 소순희 길이 끊기고 뒤돌아 서야 하는 산벼랑 밑에서 강물 소리 듣는다 길이 다한 곳에 주저앉아 주야장천 스미고 쓸어안아 몇백 리를 흘러왔을 강물 바라보며 나, 누군가에게 한 번도 무너지지 못하고 동행하지 못한 자갈같이 단단한 마음 하나 살얼음 끼는 십일 월 강물 속에 던져 넣는다 필경 썩어져 자연으로 돌아갈 오장육부 고행길은 또 어디에서 부초처럼 떠돌다 본향으로 갈까나! 2018

시와 사랑 2019.08.25

감나무

감나무 소순희 나를 보자 사십구 년 전에 하늘 가신 아버지를 보는 것 같다는 이웃 살던 누님의 말에 나는 거울 앞에 서서 지금의 나보다 젊은 아버지를 보았다 문득 칠월이 앞을 가로막고 있음을 알았을 땐 유월을 지나왔음이 송구스럽다 생전에 꿈꾸었을지 모를 손자가 유월에 한 가정을 이뤄 분가해 나간 다음 유품 하나 없는 아버지의 존재를 애써 거울 속에서 찾아내고 있었다 우울증 앓던 마흔일곱 고단한 십일 월 빈 하늘의 별들도 제자리로 돌아가고 새끼 몇은 살아남아 이렇게 살아남아 당신 일생을 기록하지 못한 쉰 목소리로 갈래갈래 가지 뻗은 마당귀 감나무만 무심한 듯 얘기했다 2019 유월

시와 사랑 2019.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