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사랑 434

한 점 그림을 위한

한 점 그림을 위한 소순희 날 저물도록 바라보고 잠에서 깨어나 선 하나 그은 죽음처럼 고요히 잠긴 날은 그대로 그림 속 점경 인물이 되고 싶었다 색조의 리듬을 유지하는 일이 감각의 평형기관에 뭇매질처럼 아프다 혼은 어디 가고 밥이 그려질 때 몇 날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마음 고픈 날에는 시종이 맞물려 도는 그 혼미한 희열을 캔버스 네 각마다 느끼고 싶었다 미완의 그림이 나를 찾아올 때 비로소 세월에 묻은 청춘의 붓질이 한 점 그림을 위한 내 안의 울림이었다

시와 사랑 2020.05.03

봄이 와서야

봄이 와서야 소순희 겨울 지나면 아늑한 날이 온다고 껍질 트는 나무 사이를 긋는 간결한 바람 그 바람이 흔드는 댓잎 소리 겨우내 몸 숨기던 참새 떼의 촘촘한 깃털이 대밭 머리에 흩날린다 내의를 벗는 봄날은 여기저기서 홀가분한 모양으로 툭툭 몸이 튼다. 산수유 꽃망울도 참새떼도, 산도랑 버들치 눈빛도 봄이 와서야 제 몸이 트인다는 걸 봄바람이 간결하게 전하고 갔다

시와 사랑 2020.03.17

그 달밤

그 달밤 소순희 이제 와 생각하면 더없이 황홀하던 내 스물다섯 그해 가을 달밤 고향의 방천(防川)둑길을 나 홀로 걸어 들국화 위에 덮이던 푸른 달빛 홀로 보기 아까워 죽어도 못 잊을 달빛 속에 나는 묻혔다 이순의 귀도 열려 더러는 걸러 듣는 아득한 세상사 누군들 용서치 않으랴 다 잊어도 그 달밤 벌개미취 들국화는 이렇게 가슴에서 피어나고 온전한 강물 소리 귀에 들려도 다시 오지 않을 스물다섯 나의 비망록 [備忘錄]

시와 사랑 2020.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