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리 <강변 풍경/소순희/10호/유화> 순리 소순희 오월이 오고부터 앞산 뻐꾸기 소리 온종일 깊어 목이 쉬었다 어느 산인들 새 울음 없겠느냐만 이 소리 들려올 때면 새들의 생존법도 자연계의 순리인데 거저 되는 일 어디 있을까 이제 막 찔레순 돋을 때 저리도 고요히 산 흐름에 실려 오는 .. 시와 사랑 2020.05.08
한 점 그림을 위한 한 점 그림을 위한 소순희 날 저물도록 바라보고 잠에서 깨어나 선 하나 그은 죽음처럼 고요히 잠긴 날은 그대로 그림 속 점경 인물이 되고 싶었다 색조의 리듬을 유지하는 일이 감각의 평형기관에 뭇매질처럼 아프다 혼은 어디 가고 밥이 그려질 때 몇 날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마음 고픈 날에는 시종이 맞물려 도는 그 혼미한 희열을 캔버스 네 각마다 느끼고 싶었다 미완의 그림이 나를 찾아올 때 비로소 세월에 묻은 청춘의 붓질이 한 점 그림을 위한 내 안의 울림이었다 시와 사랑 2020.05.03
송곳 송곳 소순희 너그러워질 때가 되었는데 맘 밑바닥에 생것들 삭을 때도 되었는데 아직 송곳 하나 남아 있다 누군가 나를 흔들면 날 선 침으로 그를 찌른다 얼마나 더 나를 죽여야 얼마나 더 나이를 먹어야 몇 날 밤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모난 부분 닳아 날카로움이 무뎌질까 잠잠한 마음 한구석에 아직도 날 선 송곳 하나 숨기고 있다 시와 사랑 2020.04.22
제비꽃 제비꽃 소순희 올봄은 제비꽃도 슬프다 고개 숙인 담 밑 입 막은 사람들 앞에 스러지는 무관심한 봄날이 아리도록 슬프다 저 꽃 한 송이도 거저 피진 않는데 하물며 사람이랴 폐가 섬유화되는 몹쓸 놈의 역병 요망한 코로나19 바이러스 재앙은 그만 소멸하라 잊고 지낸 흔적마다 다시 꽃.. 시와 사랑 2020.04.14
목수-그리스도 예수 <골고다/소순희작> 목수-그리스도예수 나사렛 마을 요셉의 작은 목공소 언젠가 꼭 한번은 깎이고 박혀야 할 백향목 한 그루 여린 물관부가 잘리고 서른 세해 나이테를 깎이는 아픔으로 누운 그 이름 날 위해 고운사랑 되었음이랴 예감도 되지 않는 눈먼 4월 밤 옛집 녹슨 철문을 걸고 .. 시와 사랑 2020.04.11
Miss Kim 라일락 미스킴 라일락 소순희 미스킴 라일락이 피었다지요 올려다 보지 말고 내려다 보라고 키 낮춰 피었다지요 더 낮아져서 낮게 향기를 퍼뜨리는 작은 키 라일락처럼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 *미스킴 라일락~1947년 미국 식물 채집가가 북한산 야생 수수꽃다리 종자를 채취해 미국에서 원예종으로 개량한 키 작은 라일락이랍니다. 시와 사랑 2020.04.08
그리운 전화 <도원/10호/소순희작> 그리운 전화 소순희 엥간허면 한 번 댕겨 가그라 밤이면 소쩍새 울어쌓고 참말로 적적허다 시방, 우리집 울타리가에 개 복숭꽃이 훤하다 나도 아츰에 벌건 꽃 보고 화들짝 놀랬다 날씨 땃땃허면 알아서 꽃 피고 바람도 몸에 보드랍게 갬긴다 사는 일 뭐 별거냐 .. 시와 사랑 2020.04.05
살구꽃 풍경 살구꽃 풍경 소순희 어쩌다 떠밀려온 봄 하나가 거짓말 같은 살구꽃을 피워냈습니다 그렇게 흰 빛 잠결 같더니 날 홀려버리고 볕 아래 홀려버리고 그냥, 화안하게 웃고만 있었습니다 나는 그만, 봄날이 허기져 아득히 허기져 아심찬한 살구꽃 그늘에서 김밥 몇 알을 꾸역꾸역 먹고 있었습니다 시와 사랑 2020.03.29
봄이 와서야 봄이 와서야 소순희 겨울 지나면 아늑한 날이 온다고 껍질 트는 나무 사이를 긋는 간결한 바람 그 바람이 흔드는 댓잎 소리 겨우내 몸 숨기던 참새 떼의 촘촘한 깃털이 대밭 머리에 흩날린다 내의를 벗는 봄날은 여기저기서 홀가분한 모양으로 툭툭 몸이 튼다. 산수유 꽃망울도 참새떼도, 산도랑 버들치 눈빛도 봄이 와서야 제 몸이 트인다는 걸 봄바람이 간결하게 전하고 갔다 시와 사랑 2020.03.17
그 달밤 그 달밤 소순희 이제 와 생각하면 더없이 황홀하던 내 스물다섯 그해 가을 달밤 고향의 방천(防川)둑길을 나 홀로 걸어 들국화 위에 덮이던 푸른 달빛 홀로 보기 아까워 죽어도 못 잊을 달빛 속에 나는 묻혔다 이순의 귀도 열려 더러는 걸러 듣는 아득한 세상사 누군들 용서치 않으랴 다 잊어도 그 달밤 벌개미취 들국화는 이렇게 가슴에서 피어나고 온전한 강물 소리 귀에 들려도 다시 오지 않을 스물다섯 나의 비망록 [備忘錄] 시와 사랑 2020.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