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사랑 435

감나무

감나무 소순희 나를 보자 사십구 년 전에 하늘 가신 아버지를 보는 것 같다는 이웃 살던 누님의 말에 나는 거울 앞에 서서 지금의 나보다 젊은 아버지를 보았다 문득 칠월이 앞을 가로막고 있음을 알았을 땐 유월을 지나왔음이 송구스럽다 생전에 꿈꾸었을지 모를 손자가 유월에 한 가정을 이뤄 분가해 나간 다음 유품 하나 없는 아버지의 존재를 애써 거울 속에서 찾아내고 있었다 우울증 앓던 마흔일곱 고단한 십일 월 빈 하늘의 별들도 제자리로 돌아가고 새끼 몇은 살아남아 이렇게 살아남아 당신 일생을 기록하지 못한 쉰 목소리로 갈래갈래 가지 뻗은 마당귀 감나무만 무심한 듯 얘기했다 2019 유월

시와 사랑 2019.07.31

섣달

섣달 소순희 내 삶이 그랬거늘 허기진 약속들은 바람으로 누워 섣달의 빈들처럼 누워 오래전 사람인 양 낯설다 그렇게 지나온 몇 해가 어제 같고 남몰래 간직한 세상의 일들은 한 가닥도 매듭지지 못한 무성한 바람만 성하다 산속으로 숨어든 겨울 햇살 어딘들 마음 다독여 따사로운 날 없으랴 한 해의 작심도 제 길로 돌아가고 나 유유자적 볕 아래 앉아 또 오늘이 어제인 듯 가는 시간을 산 그늘에 묻는다 섣달의 고요 속에 나를 묻는다 2018

시와 사랑 2019.07.20

고모

고모 소순희 세월은 그믐처럼 저물어가도 꿈처럼 지난날들에 미안해 미안해애 연거푸 건네는 말로 상수를 눈앞에 둔 백수의 고모님 살아오신 날들에 대한 감사와 당신의 회한을 기억장에 적으신다 심중에 간직한 평생의 언어 풀어낼 때 가슴 따뜻하게 할 수 있고 눈빛 부드러운 한 생만이 그렇게 세월을 익히는 거다 한세월 그믐처럼 저물어가도 산 그림자처럼 저물어가도 2019

시와 사랑 2019.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