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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늘

산은 늘 소순희 저녁 안개로 지워진 산이 드러나자, 눈이 내렸다 검게 웅크린 산은 평소보다 두어 발 뒤로 물러앉아 저녁 눈을 다 받았다 나도 머리에 눈을 이고 한참을 산 아래 서서 고요를 밀어내자 한 겹 어둠이 출렁였다 저 무주공산에 내려앉는 저녁 눈 흰 뼛속 깊이 나무를 길러낸, 삭신 쑤시는 골짜기마다 작은 짐승들 길러낸, 고립의 날을 한 번도 울지 않았다 먼발치에 점등된 온기를 가슴으로 받는 겨울 저녁 사랑은 늘 거기 있다고 허접한 모든 것을 덮으며 눈은 발자국마져 다 지우고 있었다 2023

시와 사랑 2024.01.02

겨울, 그 위대한

겨울, 그 위대한 소순희 쇠락한 앞산의 조망에서 눈을 거둔 지 오래다 무심코 바라본 앞산은 낮아질 대로 낮아진 채도의 나무들이 서로 얼굴을 부비고 있다 지난가을보다 푸른 하늘은 산 위에 요염한 낮달을 품고 날 것 하나 올리지 않았다 겨울은 이미 잉태의 축복이 서린 바이올렛 그레이 나무들 만삭의 여인처럼 서 있다 저런 고상한 것들은, 저런 생명들은, 내가 감춘 마음의 밑바닥에서 솟구치는 위대한 흔적이다

시와 사랑 2023.12.27

Christmas

늘 그래 왔듯이 해마다 12월 25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일로 정해졌지만 정확하지는 않다고 한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 하니라.)마태복음 1:21 사랑의 확증으로 세상에 성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 죄악을 사하여 주신 주님을 기뻐하며 기념하는 날이 성탄일이다. 그러나 주인공이 뒤바뀐 상황설정으로 우리는 얼마나 주님 오심에 비중을 두는가 말이다. 크리스마스하면 예수그리스도보다 산타클로스가 떠올려지니 참, 아이러니하다. 예수님은 문밖에서 추위에 떨고 계시는데, 주님 탄생일에 끼어든 산타클로스 영감의 혈색 좋은 얼굴에 웃음 띤 모습으로 빨간 코 루돌프 사슴이 끄는 썰매를 타고 와 전해준다는 양말 속 선물에 마음이 쏠려버린 크리스마스는 의미가..

억새꽃

억새꽃 소순희 억새 흰꽃이 허공에 흩어진 뒤에도 아직 꽃줄기에 붙어 떠나지 못하는 몇 개의 꽃을 보며 자식 못 떠나보내는 어미를 생각했다 훨훨 떠난 자리마다 뼈만 남은 마디사이 그중 제일 못난 놈이 찬 바람 맞으며 어미의 외로운 끈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겨울이나 지나면 가라고 붙드는 것일까 마음 둔 찬 바람 이는 산기슭 외진 곳 야윈 어미의 손을 겨울 가도록 놓지 못하는 억새꽃 몇 개 2023

시와 사랑 2023.12.17

슬픔에 대하여

슬픔에 대하여 소순희 도저히 믿기지 않는 오래 묵은 슬픔은 어둑해진 전나무숲 아래 그믐처럼 내려앉아 있다 가을이 가기 전 뜨락에 내려서서 올려다본 나무 끝 하늘엔 별 몇 개가 올라앉아 내 슬픔을 기어이 어루만지고 있었다 때론 허용된 일말의 긴박한 말도 설정된 운명이라 생각하면 차라리 가벼운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여긴다지만, 그래도 슬픔 하나 없다는 건 허망하다 저녁 하늘을 밟고 어둠 속으로 날던 기러기도 어린 기억의 오래 묵은 슬픔이다 2023

시와 사랑 2023.12.13

제85회 목우회 회원전

제85회 목우회회원전 기간 : 2023.12.13(수)~12.18(월) 장소 : 라메르 갤러리3층(서울시 종로구 인사동5길26 T.02-730-5454 여름내 뙤약볕 아래 온몸으로 떠받힌 더위의 속성에 유폐된 하루도 그들에겐 던져진 터 이상의 의미가 있다. 식물의 본능에 솔직한 습성으로 가 큰 근위대처럼 서서 두런두런 여름 버티더니 심겨진 그곳이 최후의 베이스캠프인 듯 대궁이 박고 폭풍우도 견뎌냈다. 하늘을 우러러 꽃잎을 피우고 처음 잎줄기에 보내 줄 양분을 끊어내며 위로 어린 잎줄기와 검은 눈빛 씨앗을 익히더니 마침내 자식에게 자양분 다 내어 준 에미처럼 늙은 뼈마디와 시들어 빠진 잎 몇 개 가을바람에 흔들린다. 그러나 안으로 안아 들이는 검은 눈빛의 씨앗은 이 땅의 생명을 이어 갈 에미의 살아 있는 ..

한순간 꿈처럼

2023,11,11 Sketch 가을 깊어 기온이 급 강하했다. 나뭇잎 지기 전 남겨야할 한 해의 가을이다. 볕이 좋은 날이다. 한순간 꿈처럼 소순희 저 색깔 고운 가을녘이면 님아 죽음보다 깊은 잠도 헛되지 않으리 결국은 너와 나 황혼의 가을 속에 눕는 일이 그다지 부끄럽지 않거니와 목멘 기다림도 구석기 유물처럼 무딘 족쇄의 구속인 걸 지상의 살아 있는 것이 숨죽여 침묵할 때 가만히 침잠하는 몹쓸 놈의 잠도 귓바퀴를 돌다 쉬이 거두어들이는 그늘 속에 다시 빈손으로 접는 긴 산 그림자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시점에서 서로 다른 뜻도 기어이 소실점으로 사라지는 허망한 바람 같은 것 아니더냐 사랑도 한갓 생의 추임새로 신명 나더니 한순간 꿈처럼 지나온 세월 앞에 온순해지네 아,아 몰락함도 어차피 시린 너..

시와 사랑 2023.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