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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의 가을

도봉에서 소순희 가을볕에 도봉의 이마가 희다 어쩌자고 산록은 다시 붉어 눈시울 적셔오느냐 말 없이 지워지는 산 그림자 속 입속말로 불러보는 단박에 그리워지는 사람아 나 도봉에서 서룬 가을을 맞노니 이 계절도 저물면 긴 동면의 고른 숨소리조차 설원에 잠기리 도처에서 산 메아리로 불러보는 예쁜 이름 지닌 사람아 속절없이 지는 사랑이 저 가을 같을까. 2009 이처럼 아름다운 산을 끼고 있는 거대 도시가 몇이나 될까? 근교에 도시의 허파처럼 놓인 북한산 국립공원에 속한 서울 북단에 위치한 높이 740.2m 자운봉과 만장봉,선인봉,주봉.오봉등을 지니고 있는 도봉을 보노라면 맘이 설렌다. 좋은 사람들과 산행하며 사계를 호흡하는 이 충만한 축복은 내 주님께서 내리신 은총이다. 다락능선으로 오르다보면 펼쳐진 화강암 ..

세한도(歲寒圖)

소순희작/시간에 기대어/2021 세한도~추사 김정희가 제주에 유배생활 할 때 제자 이상적에게 선물로 그려준 문인화로 국보 제 180호이다. 세한도(歲寒圖) 소순희 이제는 보내마 속 깊이 간직한 그때 너를 잡아 둘 여력도, 그리워하며 삭아가는 숭숭 뚫린 마음 자락도 매어둘 한 그루 나무도 없다 사는 게 그런 것이어서 나이 든 송백(松柏) 무욕의 그늘로 한갓 지나는 차운 바람 줄기가 오히려 무상하노니 홀로 묻는 빈 무덤 자리도 족함이거늘 유배의 한 숨 밖으로 이제는 보내줄 너만이 뚜렷이 남는 허리 휜 긴 하루가 있을 뿐이다 2021

시와 사랑 2023.08.25

배롱나무

배롱나무 소순희 사랑이여 무슨 기별 있어 기다림 남은 여름을 타오르느냐 붉은 입술은 흰 목질부에 기대어 산 죄였더니 얼마나 그리우면 눈물 바람 같은 꽃 백일을 피워내고 한목숨 지상에 훌훌 내맡기느냐 그렇게 살아온 날이 아직도 그리움이라면 영영 기다리겠네 사랑이여 2014 J에게(55)-병산서원에서 J,산다는 것이 팍팍해지거나 외로워지면 어딘가로 훌쩍 길 떠나 마음의 눈으로 풍경을 바라보십시오. 꽃다운 젊은날도 세월 앞에 숙연 해지고 무심한 것들이 오히려 정다워지는 산자락 양지녘 어느분의 유택에 가만히 앉아 말 없음의 이유로 깊어지는 중년의 내면을 성찰합니다. 3월 2일 안동 풍천면 병산서원에 왔습니다. 하회 마을을 나와 자동차 두 대가 간신히 비껴 서는 비포장 도로를 십리남짓 달리면 낙동강 상류가 태극 ..

시와 사랑 2023.08.19

감꽃 글씨

감꽃 글씨 소순희 고향 집 흰 회벽에 연필로 쓴 세로글씨가 막 돋는 아기의 젖니처럼 고왔다 염소 새끼 난 날과 감꽃이 피었다는 날을 가지런히 적어 놓았던 소 학교도 못 다닌 아버지 마흔의 봄날이 거기 피어 있었다 어깨너머로 흘러든 노을 진 하늘로 번지는 감꽃 같은 글씨 하나둘 깨치며 기뻤을 아버지 무딘 손가락 오그려 쥔 손에 아버지의 푸른 날이 획마다 곱게 배어 있었다 2019

시와 사랑 2023.08.12

내 친구

내 친구 소순희 순희야, 지금 바로 하늘 한번 봐주라. 깊은 밤 내게 메시지가 들어왔다 창가에 나가 올려다본 하늘 구름을 비켜난 달이 음력 유월 보름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혼자 보기 아까운 이 새벽의 아름다운 전율 누구랴 내게 이 선물을 보내주겠는가 나, 이처럼 충만한 밤은 잠 못 이룬들 무엇이 헛될까 음력 열 닷새 허공에 뜬 달에 쏘아 올린 마음 맑은 그대, 내 친구 용재의 시선이 휘영청 맑구나 2023

시와 사랑 2023.08.05

쥐 소순희 "아. 그 잿더미에서 불이 붙은 거 아녀?" "몰라 아척에 재에다가 물 뿌리고 갔다 놓았당께" 용식이 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죄인처럼 조아렸다. 타다 남은 헛간 기둥과 서까래가 숯덩이로 검게 남아 있는데 실연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아, 글쎄 안채에 엥겨 붙었으면 큰일 날 뻔했구먼" 땀이 흐른 어른들 얼굴엔 불을 끄느라 검은 검댕이 묻은 코끝과 볼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한쪽에선 쇠스랑으로 초가지붕을 찍어 걷어 내고 물을 비워 낸 바케스가 휙휙 마당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대여섯 명의 어른들이 타오르는 불길을 간신히 잡았다. 용식이네 마당 북쪽으로 지어진 헛간이 반 이상 타 버렸다. 이젠 안심이란 듯 서로를 바라보며 키득거리는 마을 어른들의 어깨 너머로 겨울 노을이 스러지고 있었다. 눈이 녹을 ..

막장에 대한 예의

막장에 대한 예의 소순희 화절령 운탄고도를 진폐증 앓던 제무시가 그르렁대며 넘었다 고생대 칠흑의 어둠을 두더지처럼 먹고 산 막장의 선산부 김형 더는 물러설 벼랑도 없다고 선택한 지하 몇백 미터 저승에서 뼈 갈아 숨 가쁘게 벌어 온 돈으로 이승의 생을 꾸려가던 살가운 가족의 웃음 소리마저 검은, 갱도 나무 기둥에 화석으로 새겨 놓은 오늘도 무사히 라는 말 얼마나 절실했으면 퇴적층이 된 아버지의 하늘과 젖 물리지 못한 어머니의 땅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막장의 삶도 더운 피가 흘렀더니라 낙엽처럼 사윈 그해 가을 소금기 절은 갱도 벽에 긁어 파낸 뜨거운 글씨 오늘도 무사히! 안전모의 불빛에 맥없이 흐렸다 2023 화절령~ 강원도 영월군 중동면과 정선군 고한읍의 경계인 백운산 자락의 고개이다. 근처 탄광에서 채탄 ..

시와 사랑 2023.07.16

별이 지는 쪽으로

별이 지는 쪽으로 소순희 별이 지는 서쪽으로 가다 내 껍질 속 나도 망초꽃 무성한 길을 걷고 있음을 보았다 한낮을 지나온 이순저수지 해거름 놓인 발자국 자취 없는 흙냄새 피어 길을 가다 멈춰서서 바라보는 노을 길은 여전히 아득하기만 하다 아직은 여름꽃 지지 않아 푸른 기다림인 양 물새들 날고 잠긴 물은 무슨 꿈이 있어 퍼내도, 퍼내도 산 그림자 담아 내느냐 별이 지는 서쪽은 내 영혼의 잠 터 은밀히 풍경 속에 물들어 가는 2022

시와 사랑 2023.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