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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숲에서

자작나무 숲에서 소순희 죽렴지맥의 마차령을 넘으며 직립 보행하다 멈춰선 나무를 보았다 흰 목질부를 드러낸 자작의 겨울이 이다지도 깊이 숨어든 까닭을 아는가고 숲속에드니 옛적 산 몇 번지에 전입한 멧비둘기가 고요 속으로 추락한다 해발 칠백고지의 눈 덮인 산중 하강의 엄숙함이 발목 잡는 자작 숲에는 나그네 겨울 하루 두고 온 서울의 온정이 눈물겨워 나무 끝 하늘만 바라보다가 몸통 끌어안고 귀 대어보니 아득하게 비어버린 내 유년의 성장통을 자작 숲도 겨우내 앓고 있었다 죽렴지맥 (竹廉枝脈) 백두대간 함백산 만항재에서 석항천 북쪽 죽렴산 곰봉(1016),고고산 능암덕산을 지나 동강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40km의 산줄기를 죽렴지맥이라한다

시와 사랑 2023.03.02

직박구리의 겨울

직박구리의 겨울 사과 한 쪽이 상처가 나고 짙은 갈색으로 변해가자 아내는 버리려고 골라 두었다. 장수 누님이 보내준 사과인데 어쩌다 이렇게 되고 보니 아깝지만 버릴 수밖에 없었다. 마을 주변을 둘러싼 과수원이 붉은 열매를 내보이는 늦가을엔 풍요로움에 마음도 너그러워진다. 누님의 밭 가에도 사과나무 몇 그루가 해마다 붉은 열매를 매달고 있었다. 그중 잘 익은 사과를 보내 준 누님의 열일곱 살 적 붉은 볼이 떠 올랐다. 겨울은 새들에게도 시련의 계절이다. 인가 가까이 날아든 배고픈 조수들의 먹이 찾는 모습이 안쓰러워 나는 사과를 집어 들고 출근하며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소나무 가지 사이에 사과를 올려 두었다. 다음 날 아침 눈아래 뺨에 갈색 무늬와 회색의 가슴팍에 하얀 점이 박힌 까만 눈의 직박구리가 사과..

겨울 나무에 대한 명상

겨울 나무에 대한 명상 소순희 어제는 산에 가서 겨울잠에 취한 나무들을 보았다 찬란함도 한때 이거늘 서늘함에 몸 뉜 맹아의 가지 끝 건조한 하늘로 삐릭삐릭 삐이익 의문의 문장을 송신하는 산새 한 마리 머물다 간다 뒤숭숭한 꿈을 꾸는지 골짜기마다 나무들, 막 젖 뗀 유아의 잠꼬대처럼 흔들림이 애처롭다 산 어디에나 슬어 놓은 새끼들 숨소리마저 막막한 겨울 한 철 던져진 곳 척박한 생의 목마름으로도 뿌리 박고 어깨 겯는 동거가 살아 간다는 이유로 성스럽다 나이테를 좁혀가며 맨몸으로 견디는 고락에도 아름다운 속내의 현실이 드러나는 이 숭고한 의식을 외면할 순 없지 않는가 2021

시와 사랑 2023.01.01

십이월의 눈

십이월의 눈 소순희 홀연히 떠나는 섣달의 그 밤 내 기억 속에선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그 길이 어둔 밤길일지언정 가야 할 길은 열려있구나 침엽 낙엽수 가지에 걸린 하현의 쪽 달 어슴푸른 하늘길로 날개짓 하는 호접의 혼처럼 그대 설익은 한 그릇 사랑이 뭇 연인의 꿈이었으나 다시는 돌아오지 말지어다 사랑했노라고 입속말로 거두는 지상의 슬픈 언어로 덮는 십이월의 눈, 눈

시와 사랑 2022.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