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야기(캔바스 위의 날들) 89

어느 봄날

십 오륙 년 전 제자의 집에서 포기나누기로 얻어 온 공작선인장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꽃을 피웠다. 몇 해가 지나도록 꽃 피울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저 무관심으로 죽지 않을 만큼 물 주고 겨울 추위에도 베란다에 방치하다시피 두었는데 지난해 봄부터 꽃자리를 잡더니 맑고 진한 붉은빛 꽃을 달아 주었다. 기특한 것 ! 내가 간섭하지 않아도 때 되면 할 일 다 하는 자연률의 일부를 대하니 이 오묘한 섭리 앞에 내 존재는 작아지고 마음은 넓어지는 기분이다. 이러함이 어찌 인간의 힘으로 된다는 말인가? 2021.4.29. 소순희

구로다 세이키 기념관에서

구로다 세이키 기념관에서 소순희 일본 근대 서양미술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구로다 세이키(1866~1924) 기념관은 1928년에 지어졌다. 그 기념관을 찾을 때는 겨울 저녁 무렵으로 석양이 건물 외벽에 포근한 색채를 내리고 키 큰 나무들의 끝머리에 하루의 빛이 내려앉을 즈음이다. 개관 특별 전시 기간은 2017.1.2.~15 / 2017.3.27~4.9 이고 보니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100여 년이 넘은 작품들을 대하며 그 시대에 서양 미술의 흐름에 합류한 동양의 한 화가로 성장한 그분의 삶을 조금이나마 엿 보며 그림에 대한 필연적 각오를 새긴다. 수용 보다는 배척의 시선이 강했을 시대이고 보면 예술이 갖는 힘은 정신 세계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영혼의 맑음으로 직격탄 처럼 마음에 꽂힌다. 일본인 이라면..

대한민국 회화제

제 33 회 대한민국 회화제(한국미술관 인사동/12.23~27) 구상회화의 재조명 그들만의 삶/2020/소순희작/20P(72.7X53.0Cm)/Oil on Canvas 그들만의 삶 속에 진입한 견해 차이는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한다. 문명사회로부터 조금은 뒤떨어진 삶이지만 그들이 누리고 활동하는 범위는 넓고 깊을지도 모른다. 광활한 대지와 단순명료한 생각의 틀 안에서 얻어지는 것으로 만족하는 무욕의 삶이 어쩌면 소유보다는 자유를 더 소중히 여기는 유목의 삶 자체가 행복지수를 높게 측정하는 이유라면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이동식 집 게르를 보더라도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떠도는 초원의 삶은 어차피 무성한 초지가 멈춤이라는 여유를 끌어낼 뿐이다. 맑은 대기에 밤이면 쏟아질 듯 뿌려진 별천지는 그들이 쓰고 버..

그 가을의 기억

경북 문경시 가은읍과 충북 괴산 연풍면을 끼고 있는 희양산(998m)에서 흘러내린 양산천의 가을을 스케치한 그림이다. 추수가 끝 난 빈 논 밭은 평온하고 스산한 기온이 맴도는 11월 상순의 양산천에 그림자를 드리운 나무들은 아직도 가을 잎을 달고 서 있다. 계절마다 색 다른 변화를 이끄는 신의 섭리와 자연에 감사한다. 파스텔 톤의 곰삭은 빛깔이 심중을 파고드는 건 아니 온 듯 가는 계절의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미묘한 색조의 변화와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원경의 이웃 풍경들이 보일 때가 참, 예쁘다고 생각된다. 그래도 눈으로 보기엔 화려한 색조의 선명한 시절을 한 번쯤 누려 보고 싶었다.

Korea Art Festival 2020 1 15

수 년 전 남영역 근처에 작업실을 가졌다. 간혹, 작업실 열쇠를 가지고 나오지 못한 날은 누군가가 키를 가지고 나오기를 기다리며 나는 청파동 산 몇 번지의 골목을 산책 하곤했다. 오랜동안 지켜온 누추한 달동네의 골목이 정답게 다가오고 삶의 질곡이 배어 있는 집들을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다. 봄이면 담 너머로 얼굴을 내미는 라일락꽃 그리고 집마다 제라늄 화분에서 붉은 꽃이 오래토록 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달과 6펜스라는 입체 간판을 단 거리를 스케치했다. 숙대 거리는 젊은 이들의 활보로 늘 생기가 넘쳤다. 그곳 거리에 장미 그림을 많이 걸어 둔 카페가 있었는데 커피보다 그림이 좋아 몇 번 들렀다. 그 시절도 이젠 그림속에 정지된 상태로 오래도록 나와 동행하며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