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볕 봄볕 어렵사리 비집고 든 봄볕 몇 점을 저울에 달아 보았다 낡은 촉수의 바늘은 한 바퀴 돌아 원점에 와 있고 작은 개미 한 마리 체중을 재는 봄날 뜬금없이, 허깨비 같은 어머니 몸무게가 떠오른 것일까 나긋나긋 파고드는 봄볕이 어깨에 얹힐 때 그분의 따순 손길 봄날에 우련하다 소순.. 시와 사랑 2011.06.06
살다 지치면... 살다 지치면... 병섭에게 수분재 아래 꿈결처럼 흐르는 쇠내를 따라 내려가면 거기 푸른 마을 속속이 잠들어 있지 물봉선 붉게 피고 검은 눈 살아 있는 미물들은 이미 청정한 섬진의 한 지류를 생것으로 그어 놓았지 곰살맞은 지명마다 눈물겹게 추억 어린 그곳에 가 보아라, 친구여! 오월.. 시와 사랑 2011.05.28
방명록 방명록 여기 한 장의 백지를 남기고 저문 길을 갑니다 어느 누구 여기 오시면 먼저 간 이들의 발자취 남아 있듯 그대 이름 남겨 두고 오십시오 세상에 미운 것 예쁜 것 그대로 한 편 시가 되는데 바람이 지나면 나뭇가지 흔들리고 물이 흘러간 자리 흔적이 남는 것 사는 일 잠깐이지만 이 세상 진저리나.. 시와 사랑 2011.05.22
모정 모 정 어머니! 마음 졸이며 바라본 초록 하늘가 조팝꽃 위에 봄비 새순 위에도 보고픈 내 맘에도 봄비 그날 이후 한 그릇 쌀밥 같은 말씀으로 살아왔습니다. 2011소순희 <창포동인제3집수록> <소녀무희/소순희/2000/3호> <사진:하얀종이님> 시와 사랑 2011.04.28
굴비-2 굴비-2 어쩌다 어눌한 말 한마디에 속아 준 심정을 누가 알기나 하랴 그 청정한 심해 버리고 아침상에 몸 맡긴 굴비여! 황금빛 니 몸 헐어 아직 부실한 내 몸 어딘가에 푸른 바다와 간결한 해조음 곁들여 육신 짓노니 잠 못 드는 밤마다 염장 된 아가미의 역사를 숨죽여 쓰겠노라 북서풍에 단단해진 육.. 시와 사랑 2011.04.06
목숨 목숨 상수리나무 수액을 찾아 날아든 풍뎅이를 잡아 무참히도 목을 180도 비틀고 여섯 개 다리는 한 마디씩 날지 못하도록 뚝뚝 잘라냈다 그것을 흙 마당에 뒤집어 놓고 "손님 왔다 마당 쓸어라" 하며 땅을 치면 풍뎅이는 등껍질 속 날개를 펴 빙빙 돌곤 했다 그것이 최악의 고통이라는 걸 몰랐다 자신.. 시와 사랑 2011.03.14
겨울행 겨울행 소순희 눈 내리면 가리라 애 터지게 묵은 그리움 삭여내며 홀로 떠돌다 기우는 날이 강물에 풀리는 아늑한 꿈처럼 검게 눕고, 모조리 덮여버린 한 세월의 눈밭 담쏙담쏙 딛고 간 발자국마다 가장 먼저 봄꽃 피어나리라 유장한 겨울 강 그곳 발자국 소리 들으며 산 그림자 저만이 .. 시와 사랑 2011.02.09
어느 거리에서 <서설/4호/2010/소순희작> 어느 거리에서 미지의 거리를 걷다가 낯선 어둠에 내려서네 거리는 처음의 얼굴로 점등되고 구슬픈 G 선의 낮은음으로 쓸려가는 바람 소리 슬픈 곡조로 어둠은 은밀하게 덮여 가로수 잎 휘몰려가는 추로에서 갈 곳 몰라 서성이는 가을 사람아 울컥 눈물 나는 .. 시와 사랑 2010.12.07
수국 수국 고향 집 그려놓고 망중한 바라보는 마당귀에 수국 여름은 늘 그 자리에 머물며 돌담 사이로 기우는 오후를 딛고 일어서 있었다 푸른빛 제풀에 꺽여 누운 저녁 무렵 흰 고무신 신고 마당에 들어서니 이름도 달지 못하고 죽은 생면부지의 내 동생 얼굴이 거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당귀(고향집).. 시와 사랑 2010.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