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777

정선에서

정선에서 소순희 길이 끊기고 뒤돌아 서야 하는 산벼랑 밑에서 강물 소리 듣는다 길이 다한 곳에 주저앉아 주야장천 스미고 쓸어안아 몇백 리를 흘러왔을 강물 바라보며 나, 누군가에게 한 번도 무너지지 못하고 동행하지 못한 자갈같이 단단한 마음 하나 살얼음 끼는 십일 월 강물 속에 던져 넣는다 필경 썩어져 자연으로 돌아갈 오장육부 고행길은 또 어디에서 부초처럼 떠돌다 본향으로 갈까나! 2018

시와 사랑 2019.08.25

복숭아

복숭아 똑똑똑 화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작업하던 여성분이 문을 열자 문 뒤에 숨어 예의 그 수줍은 듯 빙그레 웃는 친구 콧수염이 보인다. 입추도 지나고 말복도 지났지만 폭염이 계속되다 태풍의 영향으로 비가 내리는 오늘, 거센 빗속을 뚫고 성치 못한 몸으로 화실에 온 친구가 반갑기도 하고 안쓰럽다. 얼마나 친구가 그리웠으면 비틀거리며 왔을까! 우산을 가지고도 흠뻑 젖은 그의 어깨와 등이 전철의 냉기에 말라 가는 중이었지만 화실에 도착해서도 젖은 옷의 물기가 선연하다. 손에 사 들고 온 복숭아를 보는 순간 눈물이 핑 돈다. 복숭아와 연관된 나의 이야기 몇 가지가 꼭 슬픔의 언저리를 맴돌게 하는지 모르겠다. 친구 콧수염은 지난 2월에 뇌경색으로 대수술을 받고 재활 중이다. 화실의 유화 냄새가 좋다며 자주 들..

감나무

감나무 소순희 나를 보자 사십구 년 전에 하늘 가신 아버지를 보는 것 같다는 이웃 살던 누님의 말에 나는 거울 앞에 서서 지금의 나보다 젊은 아버지를 보았다 문득 칠월이 앞을 가로막고 있음을 알았을 땐 유월을 지나왔음이 송구스럽다 생전에 꿈꾸었을지 모를 손자가 유월에 한 가정을 이뤄 분가해 나간 다음 유품 하나 없는 아버지의 존재를 애써 거울 속에서 찾아내고 있었다 우울증 앓던 마흔일곱 고단한 십일 월 빈 하늘의 별들도 제자리로 돌아가고 새끼 몇은 살아남아 이렇게 살아남아 당신 일생을 기록하지 못한 쉰 목소리로 갈래갈래 가지 뻗은 마당귀 감나무만 무심한 듯 얘기했다 2019 유월

시와 사랑 2019.07.31

섣달

섣달 소순희 내 삶이 그랬거늘 허기진 약속들은 바람으로 누워 섣달의 빈들처럼 누워 오래전 사람인 양 낯설다 그렇게 지나온 몇 해가 어제 같고 남몰래 간직한 세상의 일들은 한 가닥도 매듭지지 못한 무성한 바람만 성하다 산속으로 숨어든 겨울 햇살 어딘들 마음 다독여 따사로운 날 없으랴 한 해의 작심도 제 길로 돌아가고 나 유유자적 볕 아래 앉아 또 오늘이 어제인 듯 가는 시간을 산 그늘에 묻는다 섣달의 고요 속에 나를 묻는다 2018

시와 사랑 2019.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