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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님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게 감기(고뿔)였지 싶다. 누님의 등에 납작 엎드려 귀를 등에 대고 옷에 콧물을 묻혀대던 다섯 살쯤의 유년기는 특별한 일을 제외하곤 그다지 기억 밖으로 아스라이 멀어질 뿐이다. 가을비가 갠 뒤 누님은 나를 업고 뒷골 초입의 밤나무 아래서 미처 영글지 못 하고 떨어진 밤송이를 주워 고무신 발로 지그시 누른 후 막대기로 가시가 성한 껍질을 벗겨 푸르스름한 풋밤을 꺼내 겉껍질을 벗긴 후 속껍질을 이빨로 긁어 벗겼다. 덜 영근 하얀 풋밤을 입속에 넣어주며 흐믓해 하던 아홉 살 누님의 불그레한 볼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지금도 풋내나던 밤의 속살이 입안에 부드럽게 퍼지듯 유년의 추억도 그렇게 떠오른다. 가끔 누님의 노랫소리는 등에 귀를 대고 엎드린 내 귀에 웅웅 거리며 불분명한 음성으로 전해..

메타세콰이아 숲길

메타세콰이아 숲길 소순희 하늘로 사다리를 놓은 메타세퀘이아 숲은 수직의 깊이로 하늘의 중간쯤에 소실점을 이룬다 목질부를 치며 돌아가는 바람과 엄숙함으로 말 없는 그대가 걸어간 길이 직립 도열한 수행자의 침묵처럼 무겁다 청량한 날에 숲에 든 그대는 풀 먹인 하늘 한 자락 오려 푸른 숲길에 하늘을 만들고 새들이 나는 휘영청 높은 가지 끝 구름 한 점 걸어 놓았다 우리가 사는 일 중에 잘한 일 하나는 침엽 낙엽수 그 숲에 세상에서 지친 몸 곁들어 쉼을 얻는 일일 것이다 소순희

시와 사랑 2015.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