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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달빛

고향의 달빛 소순희 바람이 느티나무를 흔들고 지나갔다 실핏줄 같은 가지가 흔들릴 때 늑골 사이사이로 고향의 달빛도 흥건히 젖어 들었다 초저녁에 켜 든 등불이 달빛 아래 숨죽이고 고양이의 날카로운 울음도 그 흔한 어둠 한쪽 내어 쫓지 못한 십일 월의 밤은 낮은 촉 수로 기우는 밤을 끌어가는데 고향 남원 산동의 들판에 질펀히 깔린 푸른 달빛 아래 낮은 지붕들이 잠든 이 고요를 지키려는지 개 한 마리 짖지 않고 하얗게 논밭을 덮던 무서리가 아버지 머리처럼 희었다

시와 사랑 2020.11.16

가을 오후

가을 오후 소순희 날씨 한 번 참 좋다 물비늘 이는 가을 오후, 그냥 물가에 앉아 있었어 민물 내음 휙 스쳐 지나간 다음 수면위로 은빛 옆구리 번득이며 솟구치는 피라미들 순간, 그 빛이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반복된 솟구침은 밥 먹는 일, 하루살이 떼 맴도는 시간 봇또랑 가에 갈대도 조금씩 자리를 나앉던 고요 속으로 물결은 자꾸만 해찰 말라는 아버지 말씀처럼 밀려와 갑자기 바빠진 오후 녘에다 오줌을 갈겼어 역광으로 하얗게 부서지던 물 위에 그 뻗침이 잠시 잠깐 시원한, 숙제를 끝낸 하루의 저녁처럼 그때 초등학교 육학년 가을 오후 범벌 땅콩밭가에 미루나무도 키가 훌쩍 커 버린 정말이지 시원한 가을 오후였어

시와 사랑 2020.11.07

천불동 계곡에서

천불동 계곡에서 소순희 나, 여기오면 가슴에 천불이 난다 꼭 한 번은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저 맑은 저 붉은 단풍 아래 묻혀있는 千佛洞 계곡 당신은 끝내 올 수도 없는 내가 무작정 갈 수도 없는 끊긴 길이라 나 여기 죽어도 서럽지 않을 가을 천불동에 들면 곰삭은 색깔마다 당신 웃음소리 저렇게 피는데 사랑했노라고 사랑한다고 짧은 수화로 보내는 기막힌 연서를 아직도 기별 없는 천불동에서 한동안 물소리로 달래며 이 예쁜 곳 안기지 못한 나는 이적지 미치도록 가슴에 천불이 난다. 2017

시와 사랑 2020.10.20

목 디스크 파열

목과 어깨가 아프기 시작한 지 나흘째다. 아침에 일어나자 팔까지 내려온 통증에 정신마져 혼미해져 온다. 주님의 인도와 안위를 기도한다. 통증의 한계점이 어디까지일까! 손가락 끝이 저리며 무감각해진다. 처음 아프기 시작할 때 내일이면 낫겠지 하며 견뎌왔는데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윌스기념병원에가서 X-Ray와 MRI 촬영 결과 목 디스크 파열이란다. 의사는, 마비가 올 수도 있다며 수술을 권장한다. "선생님, 자연 치유되는 경우는 없나요?" "나는 모르겠는데요. 그런 건 안 배웠어요." 참, 성의 없는 대답에 더는 물을 말이 없다. 그냥 신경주사 3대 맞고 약 처방 받고 귀가했다. 참을 만큼의 아픔은 계속되고 있지만 작년 허리디스크 파열 때도 약물 치료로 치유된 일이 있어 기다리며 내 주님의 ..

다시,그 길

다시, 그 길 소순희 무심코 버린 길 하나 오늘 찾았습니다 마음에서 지워진 길이라 발자국마저 묻혀버린 몇 해의 길 위로 당신이 걷는다는 바람의 소식에 나는 잊힌 시간의 회로를 되짚어갑니다 다시, 그 길을 걸어야 할 이유를 당신이 오가는 길이기에 라고 적습니다 길은 언제나 거기 있었습니다 내가 지운 길옆 외로웠던 날을 계수하는 플라타너스의 흰 몸에 새겨진 흔적도 그대로 아물고 있었습니다

시와 사랑 2020.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