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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수리 그녀

온수리 그녀 소순희 온수리의 아침을 닮은 그녀가 첫차에 아침을 싣고 왔지요 언뜻, 등 뒤에서 산나리꽃이 하늘거리다 사라진 꽃무늬 원피스 결에서 맑은 웃음소리가 톡톡 튀어나왔어요 온수리의 아침은 큰산 기침 소리로 깨어나고 눈고운 새들이 딛고 다닌 나뭇가지마다 꽃망울이 터지고 있었지요 소읍의 어린이 집으로 날마다 아침을 싣고 온 그녀는 아침 닮은 예쁜 배달부

시와 사랑 2020.08.24

안개의 말

안개의 말 소순희 그날, 그대가 히말라야시다 푸른 나무 그늘에서 안개 같은 말을 남기고 떠난 뒤 나는 안개 같은 섬에서 살았다 물론 말의 높낮이나 속도에서 그대의 속마음을 가늠했지만 별 박힌 하늘이 깊어지기 전에 뒷모습만 눈에 남았다 누군가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면 사랑도 시작 된다고 하던데 나는 익명의 섬에서 떠 도는 마음 하나 잡느라 안개 같은 나이를 먹고 말았다 안개의 말이 묘연한 건 히말라야시다가 더 푸르게 익어가고 나는 점점 또렷해지는 생각을 가진 것 뿐이다

시와 사랑 2020.08.08

내 유년의 10 페이지 중에서

장수읍을 벗어나와 남원 방향으로 가다 보면 금강과 섬진강으로 분수령을 이루는 해발 539m의 수분재가 있다. 그리고 그 옆 산비탈로 하얀 산길이 낙엽송 사이를 돌아가는 게 가보지 않는 곳에 대한 호기심을 자아낸다. 마주 오는 차를 비켜서지 못할 정도의 소로를 따라 차를 몰다 보면 길 밑으로 발이 간지러울 정도의 협곡이 굽이굽이 급경사를 이룬다. 한참을 달려 그 길 끝에 가 보면 가지런히 눈에 들어오는 20 여호의 오래된 마을 하나가 큰 산에 에워싸여 요새처럼 박혀있다. 누가 언제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을까? 아마 몰락한 딸깍발이 선비나 아님 벼슬이 싫어 낙향한 어느 분이 숨어들어 초야에 묻혀 심신을 달래며 그곳을 벗어나지 않고 뼈를 묻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그다지 낯설지 않은 그 풍경을 스케치하며 ..

봉숭아

봉숭아 소순희 장독대 곁에 다물다물 매달려 꽃 핀 봉숭아 따 팔순 지난 할머니 감나무 그늘에 앉아 손톱에 봉숭아 꽃물 들인다 동여 맨 열 손가락 수줍게 내밀며 "봉숭아 꽃물디리면 저승길이 밝다요." 눈 감으면 어두워 이승의 숨 놓으면 그 가는 저승길 어두워 훤히 밝히고픈 염원으로 꽃물 드리는 예쁜 손톱 아아 살아가는 동안 몇 해의 여름이 더 다소곳이 지워졌으면

시와 사랑 2020.07.20

그 가을의 기억

경북 문경시 가은읍과 충북 괴산 연풍면을 끼고 있는 희양산(998m)에서 흘러내린 양산천의 가을을 스케치한 그림이다. 추수가 끝 난 빈 논 밭은 평온하고 스산한 기온이 맴도는 11월 상순의 양산천에 그림자를 드리운 나무들은 아직도 가을 잎을 달고 서 있다. 계절마다 색 다른 변화를 이끄는 신의 섭리와 자연에 감사한다. 파스텔 톤의 곰삭은 빛깔이 심중을 파고드는 건 아니 온 듯 가는 계절의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미묘한 색조의 변화와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원경의 이웃 풍경들이 보일 때가 참, 예쁘다고 생각된다. 그래도 눈으로 보기엔 화려한 색조의 선명한 시절을 한 번쯤 누려 보고 싶었다.

시든 꽃 보며

시든 꽃 보며 소순희 꽃이 시들고도 꽃진 자리에 밴 향기는 오래도록 머물러 주었다 사람들 눈길 거둔 꽃자리에 곱게 싸 안은 꽃의 자궁 속 검은 눈빛 씨앗들 꽃이 지지 않고 어찌 열매 맺히랴 어머니, 늙고 초라해질 때 자식들 뼈 굵어지고 머리 커지니 내리사랑이라고 쉬이 말하지 마라 지켜낸 한 세상 이제야 저물어 늦가을 빈들에 사위는 하룻빛 어스름처럼 약해진 어머니 육신 어느 누가 세상의 꽃이라 말하지 못하랴 계절의 꽃 진 다음에 채워지는 찬란한 아픔이여! 2014

시와 사랑 2020.06.30

사랑도 하루 일 같아

사랑도 하루 일 같아 소순희 돌아서는 등 뒤로 한 번도 내어주지 않던 노을이 피었습니다 밤꽃 환한 유월 저녁도 서둘러 그림자를 지우고 산은 더 검푸르게 제자리로 돌아가 웅크립니다 그대 사랑한 만큼 하루해도 짧아 저녁 새 몇 마리 어스름 가르며 대숲으로 숨어들 듯 사랑도 한갓 하루 일 같아 기막힌 저녁놀 빛 속으로 숨어듭니다 본디 사랑함에 있어 숙맥인지라 애써 태연한 척 어두워져 가는 밤꽃 숲을 바라보았습니다 쉬이 눈을 거둘 일 아닌 풍경 속에서 자꾸만 주먹으로 닦는 눈물이 막차의 불빛에 빨려들고 있었습니다

시와 사랑 2020.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