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777

씨앗

대지, 그 눈-Oil Painting 씨앗 소순희 쌓인 눈이 녹고 찬 바람이 불고 지나간, 버스 정류장 철제 울타리를 타고 오른 마르고 비틀린 나팔꽃 덩굴에 동그랗게 달린 통을 만져보니 까만 씨앗이 툭 튀어나온다. 겨울 견디는 씨앗의 눈이 귀여워 여나므개 통을 터뜨려 꽃씨를 받아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우연히 만져지는 우둘투둘 단단한 것이 마음 쓰여 꺼내 보니 나팔꽃 씨였다. 봄이 오면 심으려고 종이봉투에 넣어 나팔꽃 씨라고 써 놓았다. 그 작은 것이 잠에서 깨어나는 적합한 필요조건인 햇볕, 온도, 수분을 주면 휴면 상태에서 생장 활동으로 변이가 시작되면서 종피를 뚫고 밖으로 나오는데 이것을 발아라고 한다.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에서 나온 2천 년 전 볍씨에서 싹이 돋았다는 이야기가 보도된 바 있다. 또한 ..

카테고리 없음 2021.09.16

메밀꽃 필 때면

메밀꽃 필 때면 소순희 내게도 소상히 알고 있는 서럽고도 고운 추억 하나 가슴에 남아 해마다 이때 쯤이면 소롯이 살아와 마음을 적셔준다. 어머니와 큰 누님이 아버지 대신 논밭으로 나가 별바라기가 되어 돌아오고 내 중학 시절 마지막 여름은 먹장구름 한 장 떠오지 않고 맨 하늘에 가뭄만 계속되었다. 쟁기로 갈아엎어 놓은 논에선 푸석푸석 흙먼지가 일었고 독새풀이 무수히 움을 틔우고 있었다. 논밭을 묵히는 건 농부로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아픔이었을까, 어머니는 세상 근심 다 짊어진 얼굴을 하고 끝내 모내기를 하지 못한 산 옆 가랫들 논에 모 대신 구황 작물인 메밀을 심었다. 물길 좋은 들녘에서는 벼들이 고개를 숙일 즈음 천수답인 우리 논엔 눈 시리도록 허연 메밀꽃이 유달리 고왔고, 늦여름 더위 속 꽃이 만발..

카테고리 없음 2021.09.05

그해 여름

그해 여름 소순희 사 학년 여름방학도 거의 끝 무렵에 걸려 있었고 매미 소리에 묻혀 버린 여름 오후를 후텁지근한 기운에 숨이 막힐 듯했다. 이따금 매미 소리가 그칠 때마다 마을은 쥐죽은 듯 고요했고, 텃밭의 푸성귀며 돌담을 타고 오른 호박잎이 염천 볕 아래 축 늘어졌다. "아따, 왜 이리 덥다냐 썩을 놈의 날씨가 사람 죽이네! 잉" 마루에서 어머니 무릎을 베고 낮잠에 설핏 빠져들면 어머니는 노랗게 콩기름 먹인 부채로 달라붙는 파리를 부채질로 탁탁 쫓아 주셨고, 부채 바람에 비릿한 콩기름 냄새가 났다. 그러다가 어머니도 밀려드는 졸음에 못 이겨 텃밭의 처지는 채소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하루 일과 중 소먹이 꼴을 베는 것이 내게 맡겨진 일이었고 내가 하지 않으면 식구 중 누군가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므로 책임..

복숭아의 추억

복숭아의 추억 소순희 여름이 오면 유독 복숭아의 추억이 그 시절로 나를 끌어간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해 봄에 집에서 40여 리의 시내 중학교에 나는 어렵사리 입학 했다. 6학년 가을 아버지가 산에 드셨고, 마을 어른들은 상급 학교에 보낼 수 없다고 의견이 분분했다. 그런 와중에 몇몇 분은 그래도 중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어머니를 설득했다. 친구들은 하숙집으로 들고 나는 시내에 방 하나를 얻어 혼자 자취를 했다. 저녁이면 연탄불을 갈고, 아침이면 쌀을 씻어 밥을 지었다. 일주일 내내 김치 한 가지만으로도 내겐 성찬의 축복이었다. 중학교도 못 갈 형편에 내겐 감지덕지했다. 주눅 든 날을 교정의 구름 같은 벚꽃과 학교 울타리 너머로 굉음을 내며 언덕을 기어오르는 서울로 가는 기차를 보며 조금씩 학교 생활에 익..

제15회 소순희 조형갤러리초청 개인전

제15회 소순희 조형갤러리 초청 개인전 2021.7.28(수)~8.3(화) 그림을 그리면서 미의 상징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변화 되는 사계의 풍경이나 빛의 각도에 따라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모티브가 정해지면 관조와 관찰을 바탕으로 색조나 빛의 흐름을 파악하고 난 후 에스키스를 하면서 화면에 재정리하는 습관이 생겼다. 우선은 일상의 풍경이나 정물을 통해 선,면의 구성과 실존적 구상에 이른 후 면을 분할하고 해체하는 독자적인 미의 단순성을 구축하고 싶은 게 나의 바램이다. (소순희 작가 노트 중에서) 외....

파리로 가는 길

파리로 가는 길 감독: 엘레로어 코폴라 출연: 다이안 레인(앤 역)/알렉 볼드원(마이클 역)/아르노 비야르(자크 역 ) 개봉: 2017.8 소순희 일정에 없는 여정에 젖는다는 것은 설렘과 긴장감이 주는 묘한 매력이 있다. 이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직접 가지 못한 것에 대한 대리 만족의 즉흥적이고 낭만 가득한 프렌치 로드 트립이다. 영화 제작자인 남편 마이클과 프랑스 칸에 온 앤은 컨디션 저조로 헝가리 부다페스트 일정을 접고 남편만 비행기에 오르게 된다. 마이클 사업 파트너인 프랑스 남자 자크는 미국 여자 앤을 칸에서 파리까지 픽업해 주기로 한다. "파리는 오늘 갈 수 있나요?" "걱정 말아요. 파리는 어디 안 가거든요." 칸에서 파리까지 7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대책 없는1박2일의 일정 속에서 겪는..

영화 후기 2021.07.15

우리의 서쪽

우리의 서쪽 소순희 너와 나눈 밥 한 끼가 그리 고운 줄 몰랐다 목울대에 감겨온 사랑했다는 말 한마디 계면조로 떠안는 산그림자에 갇혀 너 얼마나 울었느냐 서쪽 하늘에 주홍의 꽃이 필 때마다 보고 싶었다 내 하루 이렇게 져가는데 어디 맘 둘 곳 있다면 너와의 거리는 멀어도 서럽지 않으리 우리 한 세상 돌다 어느덧 서쪽에 와 있으니 각자의 자리에서 바라보는 황혼도 저 홀로 스러져 아름답구나 이마저 나의 일이라 너에게 건네 줄 서녘의 그리운 편지 몇 줄 2021

시와 사랑 2021.07.08

어머니와 도라지꽃

어머니와 도라지꽃 소순희 기침병 앓던 어머니는 기관지에 좋다고 밭머리에 손수 도라지를 심었다 해마다 칠월이면 밭 한쪽이 청 보랏빛 화원이 되어 눈길을 끌었다 몇 해가 꿈처럼 지나 바람든 대궁이도 사윌 무렵 그 실한 도라지 약으로 쓰지 못하고 어머니는 아픔 없는 나라에 드셨다 평생 싸 안고 가던 몹쓸 놈의 병 끝내 세상에선 내 맘에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 남아 애터지게 들려오는 기침 소리 그나마 들을 수 없는 지금 어머니 땅에 씨가 져서 새로 돋는 어린 도라지, 기침 소리처럼 내맘을 울린다 2017

시와 사랑 2021.06.29